우리들의 블루스 한지민, 제주 아기 해녀로 변신

우리들의 블루스 한지민, 제주 아기 해녀로 변신


2019년 7월부터 자리를 지킨 해녀상은 제주도에서 기증하며 세워졌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해녀가 현실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 이것은 굳이 유네스코의 등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다. 욕심만 버리고 물질한다면 굳이 뇌선이나 타이레놀과 같은 진통제를 먹지 않고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어요. 앞으로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관심갖고 도전하고자 한다면 부디 이 좋은 직업을 즐기면서 하길 바라요. 나 역시 한평생 힘들게 살아온 습관으로 지금도 바다에만 들어가면 욕심이 생기는 바람에 스스로를 잘 다스리려 노력해요.

주 호주 대한민국 대사관

양종훈 상명대학교 교수(한국사진학회장)는 오는 4월 15일까지 제주국제평화센터 기획전시실에서 ‘제주 해녀 사진특별전’을 열고 있다. 제주 출신인 양 교수는 이번 전시에서 해녀들이 뭍에서 물질을 준비하는 과정, 물질 후 돌아가는 장면 등을 담은 사진을 출품했다. 20여 년 동안 제주 해녀를 촬영해 온 양 교수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해녀의 위대한 정신과 가치를 영원히 보존하고 잊지 않기 위해 사진전을 열었다”고 말했다. 제주 해녀들은 바다 속의 암초와 해산물의 서식처를 포함하여 바다에 관한 인지적 지도를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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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이 고령화나 질병 등의 이유로 조업을 포기하거나 사망한 것이 곧 해녀 수 감소로 직결됐다. 한편 김 강사는 상군이나 중군 해녀보다 하군 해녀를 제일 존경한다고 말한다. “얕은 곳은 파도가 엄청 세서 몸을 가누려다 다치기가 더 쉬워요.” 기자도 얕은 곳에서 끊임없이 거칠게 내밀리는 파도 때문에 헤엄칠 때보다 더 많은 물을 마셨다. 하군으로 활동하는 김 씨 역시 “하루하루가 고되다”며 “성게를 잡다가 손을 다치는 일은 비일비재 하다”고 덧붙였다. 산소통 없이 몸뚱이 하나만 의지해서 바다에 들어가려니 긴장이 됐다. 해녀들은 해산물을 담아놓는 바구니인 ‘망사리’에 ‘테왁’을 달아 바다 위를 헤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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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포문은 1회부터 3회까지 ‘한수와 은희’ 에피소드가 연다. 반면 밤에는 섹시한 의상에 술잔까지 들고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과연 이영옥은 어떤 인물일지, 그에겐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 궁금증이 쏠린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지프를 운전하셨는데 가족들에게 통일이 된다면 지프를 운전해 고향인 함경북도 무산까지 갈 것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제주에서 무산까지 둘레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지난해 포스텍 인문학 특강 요청으로 포항을 방문해 강의를 진행했었는데 시민들이 강의에 집중하는 모습 등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강의 후 죽도시장을 방문했는데 규모도 크고 멸치부터 고래까지 다양한 수산물들이 판매되고 있어 매료됐다.

‘원부연의 직업의 탄생’은 스스로 창직을 한, 나만의 단어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인과 산업 두 영역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 커리어를 꿈꾸는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전하고자 한다.

제주해녀문화유산, 지키고 보호하고 알리자

조금 덜 채취하고 욕심을 버리면 두 번 들어갈 거 한 번만 들어가게 되고 무리하지 않으니 뇌신이나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될 거예요. 나는 평생을 바다에서 물질했지만 지금도 바당으로 향할 때면 마음이 설레입니다. 고생한 결과 너희도 잘 키울 수 있었고, 개인적인 성공도 이루었고 또 우리 해녀들이 단체로 이렇게 세계에서 인정해주는 여성 전문인력으로 거듭났잖아. 엄마는 바다에서 가장 행복하고 그래서 파파할머니가 되어도 해녀를 계속할 거야." 정말 이번 기회에 꼭 우리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에 등재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 제주의 어멍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이번 기회로 알아주셨으면 해요.

지역 선택

1970년 대 말까지만 하여도 잠수의 수가 무려 1만5천 명을 웃돌았으나 2003년 12월 말 현재 타 지역에 거주하는 인원을 뺀 순수한 제주거주 인원이 약 5천6백1십 명 정도다. 유네스코 등재를 넘어 제주도와 한국을 넘어 세계로 제주해녀문화가 공감대를 확산하려면 세계인의 언어라고 하는 '문화'라는 관점에서 더욱 적극적인 정책과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제주인만이 아닌 국내외의 문화예술가들이 제주해녀를 소재로 작업할 기회를 제공하고, DB자료 구축과 제주해녀 아카이브 작업에도 속도를 내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거친 자연을 이겨내며 뜨거운 삶을 살아낸 위대한 제주 어머니들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 될 것이다. 물질과 육아를 동시에 해내던 제주 해녀의 일상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투박한 제주 음식 문화 속에는 바닷바람이 짜게 밴 듯하다.

해녀의 삶이 담긴 공연과 그들이 직접 준비한 음식으로 제주 경험

처음 걱정과는 달리 두 분 모두 바다에서 잘 적응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소식블로그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일부에서는 바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자칫 해녀의 수가 늘어나면 자신의 해산물 수확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해녀도 있기는 해요.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세계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특히나 여성의 직업이라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더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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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직업반 수업을 듣고, 어촌계에 가입하는 절차를 차근차근 밟으면 해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촌계 해녀회에서 남자도 받아줄까 모르겠지만, 회원 80%의 동의를 받으면 된다고 한다. 제가 마을에서 5년간 살았지만, 주변 분들로부터 ‘저 사람이 해녀가 되면 마을발전에 도움을 줄 것 같다’는 평판을 들어야 한다.

남녀가 물질을 하는 경우는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영도 해녀는 ‘깡깡이아지매’, ‘재첩국아지매’, ‘자갈치아지매’, ‘국제시장아지매’ 등 부산지역 근로 여성을 태어나게 한 원형이다. 다소 불편한 사회적 인식에 맞서 그들이 보여준 삶의 의지는 그만큼 강렬했다. 결혼식이나 초상을 함께 치르며 2, 3일을 쉬던 관행이나 철마다 떠나던 단체여행, 매달 하는 회식도 사라졌다.

해녀

그해 11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전개된 제주해녀 투쟁을 지원했다. 해방 직후 제주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본 이벤트는 4월 펀딩 시작 날 부터 펀딩 마감날 까지 진행합니다 또한, 알림신청 후 펀딩한 서포터만 참여 가능하며, 이벤트 선물 전달은 당첨된 분께 따로 연락드릴 예정입니다. 당첨자 발표는 4월 중순 펀딩 종료 후 새소식을 통해 공지할 예정입니다.

해녀들이 작업을 하다 물 위에서 휴식을 취할 때 몸을 의지하거나 헤엄쳐 이동할 때 사용하기 때문에 가슴에 품어 안기에 알맞은 크기의 것을 선호하였다. 망사리는 해산물을 채취하여 담아 넣는 그물주머니로 재료에 따라, 그물 짜임의 섬세함에 따라 헛물망사리, 메역[미역]망사리 등 용도와 명칭이 다르다. 대학에서 금속공예디자인을 전공한 김연주 씨는 화장품 회사 마케팅부에서 10년간 근무했다.

문섬의 주요 지형은 파식절벽, 파식대, 고해식동굴, 타포니 등을 들 수 있다. 전 해안을 따라 파식절벽이 발달하며 대체로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나 남쪽 해안에서는 비교적 저경사를 이룬다. 해식동굴은 남서쪽 해안에 약 10m 고도를 따라 3개의 해식동굴이 발달하며 북서-남동 방향으로 선형의 배열을 이룬다. 해안부 암석의 표면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상을 보이는 타포니가 원형 또는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주로 수직면에 발달하나 다른 부분에서도 잘 관찰된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전문 여성, '제주 해녀'

혼백상자와 두렁박 외에도 해녀는 전복을 떼기 위한 빗창과 물 밑을 헤집기 위한 까꾸리(갈퀴)를 휴대했다. 1931년, 제주도의 해녀들은 세화, 구좌, 성산에서 수천 명이 빗창을 들고 일어서 일제에 맞섰다. 1998년 구좌읍에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졌고, 2006년에는 탑 주변으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이 조성되었다. 아기 해녀 한지민과 상군 해녀 고두심을 포함한 제주 해녀들, 생선 경매 중인 선장 김우빈의 모습이 색다른 볼거리를 예고한다. 눈이 확 트이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이들의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궁금하다.

믿을 것은 자신 뿐, 위험한 물질을 하려면 해녀들은 언제나 바다를 관장하는 용왕신에게 의지해야 했다. 바닷가 해신당과 잠수굿에는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는 그녀들의 간절한 마음이 함께 헤엄친다. 해녀는 물에 들어갈 때 혼자 들어갈 수 없고, 반드시 ‘물벗’이라고 부르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전공의 수련을 마치고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일하게 된 그는 제주도에 한 달 살기로 놀러 왔다가 우연히 ‘해녀학교 신입생 모집’이라는 플래카드를 보았다고 했다. 그는 “이직하는 과정에서 4.5개월간 시간이 비어 재충전과 휴식을 하고 싶었다”며 “원래 허리가 좀 아팠는데 여름 내내 바다에서 잠수하고, 채취하는 재미에 흠뻑 빠지다 보니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일부 oxea 봉상체 표면이 미소 박판으로 이탈하는 박리나 미세한 관상 함몰부 등 용식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모습들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변이 모습들은 monactinal의 style에서도 일부 관찰되기도 하였다. Diactinal의 다른 유형들인 acanthoxea, strongyle, tylostrongyle 등은 산출빈도가 매우 적었다. Monactinal에서도 style을 제외한 다른 유형인 acanthostyle, acanthotylostyle, tylostyle 등은 드물게 산출되었다. 또한 해면침골의 산정에 포함되지 못한 파손된 상당수의 봉상체 등은 대부분 oxea와 style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둘레길 체험은 서명숙 이사장 및 포스텍 노승욱 교수, 포항지역학연구회 회원 5명이 함께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3코스를 걸었다. 제작진에 따르면 한지민은 물에 대한 공포감을 이겨내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두꺼운 해녀복을 입고 벗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구좌면장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해녀 시위대는 제주도사 겸 해녀조합의 조합장인 '다구치'를 막아선 뒤 결의문을 낭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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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제가 시작되면 돼지고기 자체를 입에 안 댈뿐더러 냉장고에 있는 돼지고기도 다 비워야 해요. 선배 해녀나 물질을 잘하는 상군 해녀는 초보 해녀와 하군 해녀를 위해 상대적으로 깊은 바다에서 물질을 했어요. 하군 해녀의 구역, 중군 해녀의 구역, 상군 해녀의 구역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죠. 하군 해녀가 수확할 수 있도록 일부러 가깝고 얕은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고 멀리 나갔어요. 또 나이가 들어서 활동량이 조금 떨어지거나 초보인 해녀들을 위해 잘하는 해녀가 미역을 따서 한 망사리를 먼저 주고 본업을 시작하기도 했어요. ‘해녀의 부엌’은 제주 해녀의 깊은숨과 한이 서린 뿔소라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녀노래는 해녀의 발상지라고 볼 수 있는 제주도에서 형성되어 제주도에서만 가창되다가 출륙 금지령이 해제된 이후부터 제주 해녀들이 한반도로 출가 물질을 나오면서 한반도 해안 지역에도 전파되었다. 가창기연(歌唱機緣)인 연안 물질을 나갈 때의 노 젓는 노동은 1960년대 전후로 돛배가 동력선으로 대체되면서 소멸되었고, 제주 해녀들이 한반도로 출가할 때의 노 젓는 노동은 1963년에 정기 여객선이 취항하면서 소멸되었다. 이는 기업의 수익창출에 고객만족이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밀키트(Meal-kit)제품이 지니는 강점의 차별화를 통한 만족이 밀키트(Meal-kit) 제품에 대한 충성도가 일어나도록 각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밀키트(Meal-kit) 제작 기업에서는 밀키트(Meal-kit)의 가격, 편의성, 포장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소비자의 만족도 향상을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는 실무적 시사점을 제시할 수 있다.

지역 역사교육에 조예가 깊은 퇴직교원으로 구성된 제주 항일운동 명예교사 9명은 해당 학급을 직접 방문하여 2차시 블록 수업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이비인후과에서 귀와 코 등의 검진도 받아가며 치료할 수 있는 의료적인 지원이 있어야 해요. 해녀라면 누구나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이명현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불편해하며 살아가고 있거든요. 만일 '제주해녀문화'가 2016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다면 현재 해녀의 고령화 현상에 따라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해녀가 국제기구의 도움 속에 계승 보존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세계인들의 관심과 더불어 여성전문인력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더욱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제주해녀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 원천은 공동어장을 근거로 한 자발적인 결사체인 잠수회의에 있다. 이 잠수회의가 없었다면 제주도내의 해녀직업의 관리와 이를 통한 경제활동은 성공적일 수가 없었다. 아울러 1932년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제주잠녀항쟁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잠수회의 조직적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섬 민주주의의 민회로서 역사적 재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본다. 해양문명사속의 고유직업으로서의 가치와 유네스코의 "사라질 위험이 있는 직업"으로서의 UNESCO 사회문화 유산으로 등재할 필요가 있다.

해녀마다 오랜 시간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자 ‘불턱’(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거나 쉬기 위해 만든 공간) 주위에 모여드는 수는 날로 줄어들었다. 부산시수협 등에 따르면 영도구 해녀들은 봉래동, 청학동, 동삼동 등에서 각자 활동을 하다가 동삼어촌계로 오래전에 편입됐다. 그런데 이미 별도로 공동체가 형성된 상황이라 해녀촌 안에서도 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시원한 감칠맛의 멍게도 산지에서 먹는 샛노란 싱싱함을 그대로 담았어요. 9혜택이란 혜택은 다 받아놓고, 막대한 이익만을 취하는 부영은 제주에서 아니 대한민국에서 사라지시길.. 고 배우와 제작진들은 제주해녀의 진솔한 삶을 스크린 속에 보다 잘 담기 위해, 해녀들의 마음을 생동감 있게 그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소준문 감독도 "타자의 시선으로 해녀의 삶을 바라보려하지 않았다. 강인하면서도 인간적인 해녀들의 삶을 현실감 있고 생생하게 포착하고 싶었다"고 했다. "살암시민 살암지매(살게되면 사는거야). 우리 해녀들은 가솜 속에 늘 그말을 품고 살아. 그 한마디에 모두가 견딜 수 있으니까. 살아가는데 힘든 것도 슬픈 것도 다 이겨낼 수 있으니까..." 극중 해녀 진옥(고두심)의 대사다.

영화배우 고두심 씨가 해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빛나는 순간’ 촬영을 위해 한수풀 해녀학교를 방문한 모습. 4개월간의 고된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직접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 입은 전통 해녀복인 흰색 물적삼(상의)과 검은색 물소중이(하의)를 차려입고 졸업장을 받았다. 앞서 '해녀 진료비 지원 조례'(2006년 11월), '해녀문화 보존 및 전승에 관한 조례'(2009년 11월), '해녀문화산업 진흥 조례'(2012년 7월) 등이 제정된 바 있다. 하루 7시간, 1년에 90일 정도 물질을 하며 한 번 잠수할 때 대략 1∼2분간 숨을 참는다.

이런 기록을 종합해보면, 제주에는 잠수 기술 능력이 탁월한 해양민이 있었고, 진주와 전복을 교역품으로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1079년(문종 33년) 탐라에 다녀온 고려 사신이 진주 2개를 왕에게 바친 기록도 있다. 빛이 별같이 반짝여서 야명주(夜明珠)라고 한 것은 제주가 선사 이래 잠수 어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증명한다. 연구지역은 해상에 위치하고 있어 해식작용에 의한 다양한 해안지형이 발달한다. 범섬의 주요 지형은 파식절벽, 파식대, 해식동굴을 들 수 있다. 파식절벽은 모든 해안을 따라 발달하며 급경사를 이루며, 파식대는 북쪽 해안에서는 최대 90m 규모로 발달하고, 해식동굴은 해안을 따라 총 4개가 발달한다.

대략 1.3m 정도 되며 살끝과 살대로 구성되는데, 살끝에는 뾰족한 쇠살촉을 부착했으며, 살대 끝에는 고무줄 손잡이를 달아 추진력을 얻게 했다. 쇠살촉이 하나인 것을 외가달 소살, 쇠살촉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을 양가달 소살이라 한다. 아아, 열넷에 해녀가 되어 젊은 날 평생 상처로 남는 폭행을 일제 순사들에게 당하고 해방 이후에는 시댁 가족들과 남편을 4.3의 미친 광풍 속에 떠나보낸 뒤 혼자 아들 넷을 키우면서 98세까지 살다 간 그녀 고이화. 거의 일 년여에 걸쳐 우도, 하도, 종달 해녀들이 똘똘 뭉쳐 일제에 맞서는 항일 시위를 여러 차례 도모한 1932년 해녀 항쟁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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