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4

ps4


4

 

산에는 단풍이 물들어 넓은잎나무들이 울긋불긋 단장을 했고 들에는 벼들이 무르익어 황금빛이 차넘치였다.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파랗게 개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차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거칠고 다양한 색조의 가을풍경에는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으시였다. 올해 농사작황이 괜찮아 가을바람을 타고 황금빛파도가 물결치는 들의 풍만한 정서가 그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년초부터 그토록 마음을 괴롭히던 쌀걱정이 풀리게 되여 안도감에 숨이 나가고있었지만 어쩐지 속이 썩 개운치 못하시였다. 한것은 허리를 구부리고 벼가을을 하는 농민들과 등짐으로 고달프게 벼단을 져나르는 농민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밟혀왔기때문이였다. 벌판에 소달구지가 두대 보일뿐이였다. 봄부터 잘 먹지도 못하며 여름내 해볕에 타면서 일하느라 여윈 농민들의 얼굴에 가을날의 흐뭇한 웃음이 넘실거리고 낫질을 하는 손과 지게를 진 몸에 기운이 뻗치고 성수나하는것만은 사실일것이나 그들이 입고있는 허름한 솜옷이며 헌 솜신들을 보라.

승용차는 울퉁불퉁한 달구지길을 기우뚱거리며 겨우 달리고있었다. 길이 이토록 사나운데 수령님께서 기어이 마을에 들어가보자고 하시였었다. 그래서 책임부관 리을설은 몹시 불안스러워하고있었다.

수령님께서는 달구지길이 사귀는 곳에 이르렀을 때 차를 세우시고 마침 벼단을 가득 싣고 굼뜨게 움직여오는 소달구지를 기다리시며 바람부는 들길에 나서시였다. 눈이 크고 뾰족한 뿔을 뻗친 누렁황소가 달구지멍에를 끌고 그 황소를 무릎까지 드리운 큼직한 솜옷을 입은 얼굴이 갱핏한 농민이 회초리를 휘두르며 이끌고있었다. 먼발치에서 수령님을 알아본 농민은 《이랴! 이랴!》 하고 황소를 재촉하며 서둘러댔다.

이윽하여 농민이 가까이에 왔다. 그는 입고있는 솜옷이 후렁후렁해서 새끼줄로 허리를 질끈 졸라매고있었다. 아들이나 친척이나 어느 제대군인에게서 물려받은듯한 헌 솜모자를 벗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수고합니다. 모자를 쓰시오. 바람이 찹니다.》

《괜찮습니다.》

거밋거밋하게 탄 얼굴에 수염이 까실까실하게 돋아난 농민은 벗어든 솜모자를 주무르며 어떻게 처신할지 몰라 당황해하고있었다.

《협동조합원입니까?》 수령님께서 물으시였다.

《예, 제가 여기 관리위원장입니다.》

농민은 솜모자를 가슴에 대며 머리를 깊이 숙이였다.

《아, 그래요! 관리위원장이 소를 몰며 앞장서 일하누만.》

수령님께서는 조금도 관리위원장티가 나지 않는 농민이 무척 대견하시였다.

《조합에 소달구지가 몇대 있습니까?》

《석대있습니다.》

《소달구지가 석대뿐입니까?》 수령님께서 안색을 흐리시였다.

《그걸로 한해 농사를 지었습니까?》

《수상님, 이 마을에서 제일 못사는 빈농들이 수상님말씀대로 힘을 합쳐 일하여 살길을 열어나가기로 결심하고 조합을 무었습니다. 그러다나니 농기구조차 변변한것이 없고 소달구지도 처음에는 한대뿐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락심하지 않고 합심해서 거의 손으로 하다싶이 첫해 농사를 지었습니다. 봄에 밭갈이할 때는 부농의 소를 세내여 보충해 썼는데 삯을 어찌나 비싸게 부르는지, 그래도 어찌겠습니까. 그래 한해농사를 지으니 쌀이 생기고 돈도 생겨 소달구지를 두대 더 장만했습니다. 조합원도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큰물이 나서 흉년이 든데다가 올봄에 나쁜놈들이 <강제수매>를 시켜서 조합원들이 소나무껍질을 벗겨먹고 풀을 뜯어다 죽써 먹으며 일했습니다. 모두들 얼굴이 퉁퉁 부었습지요. 수상님, 하지만 락심하지 않았습니다. 로동당의 정책이 옳다고 믿었고 한해 더 고생하자 다짐했습니다. 그런데다 국가가 조합에 대부를 우선적으로 해주어 살아났고 올농사는 아주 잘 지었습니다.》

관리위원장은 아주 구변이 좋은 사람이여서 이렇게 수령님께 긴 말씀을 드리였다.

수령님께서는 이번에 들려보신 일부 공장의 로동자들이 점심밥을 못싸오거나 시래기섞인 강냉이밥을 싸오면서도 결근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으시였었다. 수령님께서 심려하시는것을 본 그들은 가을이 왔으니 이제는 식량이 해결될것이라고 하며 걱정마시라고 오히려 위로의 말씀을 드리는것이였다. 관리위원장은 농민들도 로동당의 정책을 믿는다고 말씀드리였다.

《봄에 굶어죽은 세대는 없었소?》

수령님께서는 갈리신 음성으로 물으시였다. 최창익이가 그때 찾아와서 사람들이 굶어죽어 시체가 사방 나딩구는데 기계에서 쌀이 나오는가 하며 5개년계획작성을 비난했었다. 수령님께서는 아픈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시며 그에게 그렇다, 기계에서 쌀이 나온다, 나라를 공업화하는것이 농업문제와 인민생활을 푸는 근본방도라는것을 당신이 몰라서 그러느냐 하고 타격을 주시였었다. 그런데 관리위원장이 방금 말한 그 《강제수매》의 장본인은 바로 그자였다.

관리위원장이 대답을 올리였다.

《조합원은 굶어죽은 세대가 없습니다. 반동놈들의 선전에 속아 조합에 들지 않은 빈농세대들이 더러…》 그는 이런 말을 하는것이 죄송스러운듯 눈을 내리깔았다.

수령님께서는 바람에 봄가을외투자락을 날리시며 묵묵히 서계시였다.

들바람은 낟알냄새와 함께 야산의 솔가지들에서 풍기는 향긋한 송진냄새도 날라왔다. 씁쓸한 풀냄새와 락엽냄새, 이미 말라버린 논고의 감탕냄새도 풍기였다. 그이께서 서계시는 달구지길의 가녁에서 사람들과 집짐승들의 발에 밟히지 않고 살아남은, 잎이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설렁이였다.

논벌에서는 여전히 농민들이 낫으로 벼를 베고 지게로 벼단을 져나르고있었다. 옷과 신발이 허줄하고 일이 힘들어도 가을의 기쁨속에 취해 흥겹게 일하는 농민들을 보시며 수령님께서는 생각하시였다.

관리위원장이 로동당의 정책을 믿는다고 한 말은 겉치레의 말이 아니다. 협동조합에 든 세대는 굶어죽은 세대가 없었다고 하지 않는가. 기계화가 되기전에 협동화부터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당의 농업협동화방침을 반대하던 사람들의 교조주의적론거와 방해를 물리치고 협동화를 시작한것이 얼마나 현명한 정책이였는가.

식량난은 지나갔다. 조합도 국가의 방조밑에 자기의 길을 걸어가고있다. 그러나 너무도 물질기술적토대가 허약하다. 조합에 농기구들 특히 중소농기구들을 빨리 보충해주어야 한다. 중요한것은 뜨락또르와 자동차생산을 단축할수 있는껏 단축해야 한다.

국가가 할일이 얼마나 많은가. 농민들에게 천과 신발도 팔아주어야 할것이다.

《국가는 가을에 농민들에게 천, 신발같은 의복류와 소비품들을 많이 공급해주려 합니다. 내가 지금 구성방직공장에 갔다오는 길인데 거기서도 그렇고 평양방직공장에서도 일손들을 다그쳐 천을 짜고있습니다. 올해 분배를 받으면 넉넉치는 못해도 얼마간 살수 있을것입니다.》

관리위원장은 젖어드는 눈을 슴벅이였다.

《수상님, 저희들때문에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이제는 조합이 잘 살게 되였습니다. 올가을에는 소도 둬짝 더 사려 합니다. 가입신청자가 계속 늘어납니다. 이제는 일없습니다.》

관리위원장의 목소리는 저으기 떨리면서도 확신에 넘쳐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급한 대목을 넘기였는데 3개년계획을 앞당겨 끝낸 그 기세를 살려 5개년계획만 하면 농촌에 기계들도 많이 들어가게 되고 등짐지는 힘든 일을 기계가 대신할것이며 입는 문제, 집문제도 풀릴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관리위원장과 함께 관리위원회에도 들려보시고 농가들도 돌아보시며 조합이 어떻게 해야 일이 잘되고 잘 살며 발전하겠는가 하는 방도들을 의논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국가의 결정적인 지원과 방조에 대해 생각하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의 공업화를 실현해야 한다. 그 누가 뭐라든, 뭐라고 훼방하든, 비방하든, 방해책동을 하든 이 결심에서 물러설수 없다. 그이께서는 이렇게 마음을 굳게 하시였다.

 

집무실에 들어오신 김일성동지께서는 책임부관에게 김일을 부르도록 지시하시였다.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이고 상무위원인 김일은 농업을 담당한 부수상이였다.

푸수한 농민형의 김일이 곧 나타났다.

수령님께서는 평북도에 갔다 오시는 길에 잠시 들려보신 한 농업협동조합의 실태를 그에게 말씀하시였다. 농촌에서 협동화가 경험적단계를 거쳐 대중적발전단계에 들어선 지금 농촌경리의 기계화를 뒤따라 세우는 사업을 서둘러야 하겠다, 이것은 로동계급의 국가가 책임지고 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가 가난과 락후를 털어버리자면 나라의 공업화를 하루속히 실현해야 한다.… 그이께서 말씀하시였다.

이때 전화종이 울리였다.

송수화기를 천천히 드시니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리종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급히 보고드릴것이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쏘련에서 들여올 협조물자의 납입절차를 토의하러갔던 실무진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심중한 난관이 조성되고있습니다.》

공업화의 기초를 닦는 5개년계획의 첫해인 래년도계획은 쏘련에서 주기로 한 협조물자를 포함하여 세워졌다. 그런데 납입절차에서 어떤 문제가 제기되였는가?

《나한테 곧 오시오.》 수령님께서는 안색을 흐리시며 송수화기를 내려놓으시였다.

매우 불길한 예감이 드시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일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며 눈길을 떨구고 있었다.

《이야기를 계속합시다.》 수령님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시 울리였다. 그이께서 본래의 감정상태로 돌아오신것이다. 《내 생각에는 우리 나라의 경우 농촌경리의 기계화를 실현했다고 말하자면 한개 리에 평균 6대의 뜨락또르는 들어가야 할것 같소. 그러면 전국적으로 얼마나 있어야 하겠는가?》

그이께서는 현지지도때와 회의때 늘 지참하고 계시는 수첩을 집무탁우에 놓고 펼치시였다.

《지금 한개 군에 리가 평균 20개인데 한개 리에 최소한 뜨락또르를 6대정도 넣는것으로 보면 한개 군에 120대가 필요하오. 군을 약 200개로 보면 뜨락또르가 2만 5천내지 3만대가 필요되오. 명년에 뜨락또르와 자동차를 얼마나 사올 계획이요?》

《각각 2,500대씩 사오려 합니다.》 김일이 대답을 드리였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뜨락또르가 5천대가량 되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농촌경리의 기계화에 필요되는 뜨락또르를 매해 2,500대씩 사온다해도 10년이 걸려야 다 수입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10년간이면 그사이 처음 수입한것은 못쓰게 된다는 사정을 고려할 때 10년이 걸려도 2만 5천 내지 3만대의 확보는 곤난하게 되오. 그리고 또 누가 그렇게 척척 주려고도 하지 않소. 때문에 뜨락또르를 자체로 만들어야 하오. 이에 대해서는 정일룡부수상과 이미 이야기가 있었소. 정일룡부수상은 우리의 의도를 받들고 우선 유능한 기술지도일군을 선발해서 기양기계공장에 파견했소. 우리가 거기서 한해에 5천내지 7천대씩 뜨락또르를 생산해내면 4∼5년안에 농촌경리의 기계화를 실현할수 있소.》 수령님께서는 수첩을 덮으시며 엷은 미소를 지으시였다. 《아직은 개건확장공사를 착수한데 불과하고 현재 그곳에서는 몇대의 선반과 쎄빠, 볼반으로 쁘라우, 탈곡기, 축력파종기, 가마니짜는 기계 등 농기계들을 생산하는 정도요. 그러니 우리가 제기한 과업은 매우 높은 목표의 어려운 과업이요. 그러나 꼭 해내야 하오. 우리가 5개년계획기간에 뜨락또르를 만들려 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발도 나기전에 뼈다귀추렴부터 하려 한다고 할거요. 정일룡부수상도 우리의 기계제작공업이 뜨락또르를 만들어낼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며 처음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댔소. 사실 방금 기계제작공업이 창설되고있는 형편에서 나도 결심하기가 헐치 않소. 헐치 않단 말이요.》

그이께서 절절하게 하시는 말씀이 김일의 가슴을 끓게 하였다. 김일은 무릎우에 올려놓은 주먹을 꽉 쥐였다 폈다하며 가까스로 내심의 흥분을 삭이고있었다.

《뜨락또르의 도면도 없지 강재도 부족하지. 우리가 강재생산량을 래년부터 결정적으로 늘이려 하는것이 사회주의공업화의 기초축성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소. 그런데 우리가 새로운 전략적목표를 내세우고 그 준비에 들어선 지금 정세는 대단히 복잡해지고있으며 우리앞에 어려운 난관을 조성하고있소.》

수령님께서는 에짚트와 마쟈르에서의 사태발전과 그것이 국내정세에 미치고있는 영향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시였다.

…10월 23일 10만여명으로 불어난 부다뻬슈뜨시민들이 거리와 광장을 꽉 채우고 《자유》를 부르짖으며 라지오방송국을 점령했다. 병사들이 군중과 합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쏘련에 원조를 요청했다. 쏘련땅크들이 수도에 진입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수상의 요청으로 쏘련땅크들이 철수했다. 29일 사태는 다시 험악해졌다. 바로 이날을 택하여 이스라엘은 영, 프의 부추김하에 시나이반도의 넓은 전선에 걸쳐 에짚트의 진지들을 향해 전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뒤이어 영, 프의 폭격기들이 에짚트의 도시들을 폭격했고 침략군을 항구들에 공수하여 작전에 진입케 했다. 미국과 쏘련이 에짚트-이스라엘문제에 개입하면서 사태는 더 복잡해졌다. 제3차세계대전이 일어날수도 있었다. 미국은 이 기회에 중근동에서 자기의 리권을 확보하려 했다. 쏘련은 침략책동을 규탄하며 극력 자제하고있었다. 하긴 마쟈르에서의 반혁명폭동수습에 발목이 잡혀있기도 했다. 서방의 반동들은 마쟈르에서 반사회주의의 돌파구를 열어보려고 반혁명폭동을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그것을 에짚트에 대한 공격과 일치시켜 쏘련을 난처한 처지에 빠지도록 획책하였다. 불가닌쏘련수상이 아이젠하워미국대통령에게 영, 프의 간섭을 반대하여 공동행동을 벌릴것을 호소했으나 대방은 마쟈르에 대한 쏘련의 개입을 비난하며 그것을 배격하였다.

쏘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쓰딸린에 대한 《개인미신》이 비판된후 본격화된 제국주의자들의 반쏘, 반공선전깜빠니야는 이 시기에 와서 극도에 달하였다.

사실 마쟈르에서의 반정부폭동이나 그 이전에 일어난 동유럽나라들에서의 그러한 소요들은 제국주의의 책동이 있기도 했거니와 중요하게는 쏘련당의 반쓰딸린깜빠니야, 수정주의적정책과도 관련된다. 쏘련당지도부는 동유럽나라들의 지도부에서 쓰딸린에게 충실했던 사람들을 제거하고 이전의 정치범들, 흐루쑈브의 수정주의적정책에 적합한 인물들을 등용했다. 서방의 보도매체들은 이것을 《동방에서의 자유화바람》이라고 하였다.

국제정세는 국내의 정세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 남조선에 기여든 미태평양지구 사령관은 자기들은 조선정전협정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리승만괴뢰군부에서는 무력이외에는 국토통일의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며 미국에 원자무기를 포함한 현대무기의 공급을 요청했다. 리승만은 전쟁준비를 다그치며 《북진》소동을 매일과 같이 벌리면서 북조선사람들은 (마쟈르에서처럼) 정부를 반대하여 일어나라, 그러면 우리도 북진하겠다고 떠들었고 공화국북반부에 그러한 내용의 삐라를 뿌리는 한편 《북침》때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킬 과업을 주어 간첩들을 계속 들이밀었다. 리승만은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있은 뒤에 북조선에 대한 군사적행동을 취할것이라고 언명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내용들을 정치위원인 김일이 잘 알고있으며 이에 대처한 우리 당과 정부의 립장, 방책들을 정치위원회와 상무위원회에서 토의하고있으므로 수령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반복하여 말씀하지는 않으시였다. 그러나 김일은 수령님의 고심과 의도를 언제든지 잘 알고있었다.

《정세가 아무리 험해져간다하여도 우리는 수상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가 선택한 길을 확고히 걸어갈것입니다.》 하고 김일이 말씀드리였다. 《우리 당은 이미 허다한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지 않았습니까. 미제와 그 주구들의 무력침공을 반대하여 싸운 조국해방전쟁 그리고 주체를 세우고 자주성을 지켜온 투쟁, 물론 지금의 복구건설도 커다란 시련입니다. 이러한 시련속에서 우리의 결심과 의지는 더 확고해졌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라고 믿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그의 말에 동감을 표시하시였다,

《우리는 준엄한 시련들을 이겨냈소. 그러자니 막대한 희생을 보았소.》 그이께서 갈린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그 시련들의 후과는 너무도 아픈것이며 상처는 깊소. 이 아픔을 가시기 위해 우리는 복구건설에 떨쳐나섰고 외부세력과의 투쟁도 계속하고있소. 다시말해서 보다 준엄한 시련에 부닥치고있단말이요. 우리 인민들의 생활은 어렵소. 작년의 류례드문 대홍수로 우리는 식량난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소. 그래 외화를 들여 쌀을 사오고 입는 문제를 풀기 위해 방직공장들의 복구에 선차적인 힘을 넣었소. 도시복구건설에서도 살림집과 학교건설을 우선시하고있소. 하지만 아직 인민들은 반토굴집에서 살면서 배고파 허리띠를 졸라매며 복구건설을 하고있소.》

수령님께서는 손으로 가슴을 짚으시였다.

《이 김일성이도 심장이 강철로 주조되여있는것이 아니요. 인민생활문제가 나설 때마다 나는 심장의 아픔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되오. 솔직히 말해서 3개년계획을 했으니 좀 쉬자, 먹을것과 입을것을 우선 생산하고 사오기도 하자, 천천히 다음 단계의 계획수행에 착수하자, 이렇게 말하고싶소. 그러나 우리는 5개년계획의 높은 목표를 내걸고 계속투쟁, 계속전진하자고 호소하고 있소. 만일 우리가 값눅은 <인정>에 빠지거나 나라의 공업화를 시비하는 온갖 잡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 인민들이 언제 가서야 남들처럼 잘 살수 있겠소? 아니요! 지금 우리가 한걸음 지체하면 래일 열걸음 뒤떨어질수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우리의 의도와 사상을 막무가내로 내려먹이여서는 안된단 말이요. 우리의 일군들이 진심으로 당정책을 받들도록 꾸준히 교양해야 하고 가장 중요하게는 당의 정책이 인민대중의 심장에 접수되여야 하는거요. 인민대중이 당정책을 자기의것으로 해야 한단 말이요. 김일동무가 말한것처럼 준엄한 시련을 이겨온 우리 인민이 새로운 시련을 맞받아나가도록 이끌어야 할 무거운 임무가 우리에게 지워져있소.》

수령님께서는 김일과 같은 혁명전우들과 만나시면 이처럼 자주 자신의 괴로운 심정이나 자신께서 고심하시는 문제와 결심 등 속심을 터놓고 말씀하군 하시였다. 항일혁명투쟁의 그 나날로부터 슬픔과 괴로움, 기쁨과 승리의 날들을 함께 걸어온 혁명전우들은 경우에 따라서 비록 경제와 기술문제에 밝지 못하고 잘 모른다 해도 수령을 받드는 신념과 의리에서는 투철했고 변함이 없었다. 어려운 때 이러한 신념과 의리는 수령님께 큰힘으로 되였다.

김일은 말수더구가 적은 사람이다. 감정표현도 무뚝뚝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소박하면서도 위엄있는 표정과 짧은 말속에는 진심이 푹 배여있었다.

책임부관이 들어와 리종옥국가계획위원장이 도착했음을 보고드리였다. 수령님께서 리종옥이 도착하면 즉시 들여보내라고 지시해두셨던것이다.


Report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