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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러 와」


침대 위로 쓰러지는 두 사람을 방해하려는 듯 타이밍 좋게 민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구야, 또 그 사람이지? 상대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신경 쓰지 마. 민호는 무심한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핸드폰 꺼. 짐짓 화난 상대의 대답에 방금 온 문자를 무시하고 핸드폰 전원을 꾹 누르려는데, 또다시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데리러 와줘」

「민호야」


민호는 액정에 뜬 짧은 문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뜨린 와이셔츠를 도로 입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펴는데 별안간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너 지금 가면 끝이야. 우리."

"……."

"최악이다, 너."

"알아. 미안해."


민호는 딱히 미안하지도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렁그렁하던 상대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더 이상 사과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면서 다른 메시지가 없는지 확인했다. 없었다. 이미 오고 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마른세수를 하며 주차해둔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걸기 전에 핸들에 머리를 대고 고민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당장 차에서 내려 다시 방으로 돌아가 무릎 꿇고 빌면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매번 그러지 않았다. 그 가여운 얼굴이 눈에 밟혀서. 민호는 또 한숨을 쉬고는 차에 시동을 걸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


"공연은, 잘 했어?"

"응."

"밥은."

"아니."

"밥 잘 챙겨먹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시끄러워. 민호야."


싱거운 대화는 얼마 못가서 끊겼다. 태현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데리러 오라고 할 땐 언제고 막상 와줬더니 시큰둥한 말대답만 해댔다. 이럴 줄 알았다. 알면서도 냅다 달려온 나만 손해지. 민호는 제 손으로 날려먹은 구 애인들과의 관계가 생각났다. 태현을 이유로 민호를 걷어찬 사람만 한 트럭은 넘을 것이다. 정작 그 남태현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태현은 조수석에서 창틀에 손을 올려 머리를 괴고 있었다. 새벽 라디오에서는 태현이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니 매니저냐?"

"아니. 그러라고 한 적 없잖아."

"내가 또 너 데리러 오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래."

"진짜다. 약속했어."

"내 얼굴 안 볼 자신 있으면 그렇게 해."

"야, 그거는…."

"그거는, 뭐. 말해."

"그거는, 그니까…."

"……."

"……."

"거봐. 너는 날 그렇게 좋아하니까 안 되는 거야."


역시 태현을 상대로 한 말싸움은 하나마나였다. 또 1패를 적립한 민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오늘따라 길이 막히네, 하는 쓸데없는 소리만 했다. 막히긴 뭐가 막혀, 새벽인데. 끝까지 지지 않고 속을 긁어대는 태현이었다.


*


집에 들어서자마자 벽으로 밀어붙이는 민호를 피곤하다는 말로 잘라낸 태현은 곧장 욕실에 들어갔다. 민호는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작업실에 놓인 전자키보드를 켜 뚱땅거렸다. 새로 이사한 집에 온 건 두 번째였다. 처음 왔을 때는 밴드 멤버들이랑 합주 연습하는 걸 보다가, 멤버들이 돌아가고 나서 밤늦게까지 둘이 같이 있었다. 가지 말라고 먼저 붙잡았으면서 아침에는 문 앞에 선 민호를 두고 피곤하다고 칭얼거렸다. 야, 난 회사 가야해서 더 피곤하거든. 태현은 민호에게 안겨서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로 말했다. 이러니까 우리 꼭 사귀는 것 같아. 민호는 손목시계를 본 뒤 태현을 겨우 집 안으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제발 진심 아니면 그런 소리 좀 하지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현은 애인이 생겼다고 말했다. 빌어먹을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서 어느 날 공연이 끝나고 태현이 다른 사람과 키스하는 걸 본 뒤였다. 그 사람이랑…. 어. 태현은 민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인정해버렸다. 밴드 멤버 중에 한명이랑 눈이 맞아서 뭐 어떻게 됐다는, 시시하고 재미없는 전개였다. 민호가 태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빼면 말이다. 나한테 반해서 밴드 멤버가 되고 싶었대. 웃기지 않아? 대충 흘려들었지만 말의 마디마디가 가시처럼 박혔다. 태현은 민호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제멋대로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멍하니 작업실을 둘러보는데 벽에는 태현이 좋아하는 밴드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지금보다 어렸을 때의 태현이 생각났다. 그때도 음악을 하고 있었다. 교내 밴드부 보컬. 인기가 많은 게 당연지사였다. 태현에게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민호는 여전히 친구였다. 태현의 집에 놀러가 방에서 나란히 누워 CD로 음악을 들은 건 민호가 유일했다. 민호가 기억하는 한, 아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아이돌 제의도 몇 번 받았으나 전부 거절하고 밴드를 결성해 버스킹이나 작은 바에서 공연을 했다. 키보드 자리 비었는데 네가 할래? 태현은 여느 때처럼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거절하고 나서는 약간의 후회도 했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지금의 우리는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는 게 후회의 증거였다. 그러나 매번 다시 생각해봐도 따라오는 대답은 역시 '아니'였다.


"이렇게 누워 있으니까 옛날 생각 나."

"나도 아까 그 생각 했어."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현을 졸졸 따라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암막커튼이 있어서 눈을 뜨고 있어도 사방이 온통 새까맸다. 피곤하면 자고 가. 태현이 말했다. 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은 태현의 핸드폰 액정이 반짝였다. 의도치 않게 민호가 먼저 도착한 메시지를 읽어버렸다.


「잘 들어갔어?」

「아까 공연 끝났는데 벌써 보고 싶어」

「잘 자 태현아」


태현은 분명 아직 잠들지 않았으면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한쪽이 꽤나 힘든 연애일 것 같다고 민호는 생각했다. 물론 누구 때문에 몇번이나 걷어차인 민호가 걱정할 건 아니겠지만. 가만히 누워 새까만 천장을 보던 민호는 어느새 까무룩 잠든 태현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확인하고는 집을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차 안에서 태현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거봐. 너는 날 그렇게 좋아하니까 안 되는 거야. 태현의 말이 맞았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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