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After


말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소뵈르는 흔쾌히 한 필을 내어주었다. 좋은 품종의 건장한 말이었다. 건실한 뒷다리나 윤기 있는 갈기를 보니 지금 당장 타고 나가도 될 것 같았다. 페르낭은 습관처럼 이름을 물어보려다 그만두곤, 대신 신중한 손길로 뜨끈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두꺼운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고 까맣고 순한 눈에 페르낭이 담겼다.


“마음에 드시나 보네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보자 다시 한 번 충동의 물결이 얕게 일었다. 소뵈르가 읊는 이름을 들어두면 그를 회상할 단어가 하나 더 생길 것이다. 먼 여정을 위해 알차게 꾸린 짐에 걸맞았다. 페르낭은 간단히 감사만 표하곤 고삐를 쥐었다. 



저택을 벗어나는 길은 처음 온 그 날 외워두었다. 어딜 가든 도주로부터 파악하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페르낭은 길을 되새김질하듯 말을 천천히 몰았다.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달리면 항구가 나오는데, 말 달리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다. 페르낭은 애써 오솔길이 예상보다 짧다는 생각을 무시하며 이미 수십 번도 더 살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막 항만에 다다른 물품을 파는 즉석 경매나 선박에 대한 흥정으로 대로는 빼곡하고, 골목은 골목대로 마약 따위를 파는 담 큰 장사꾼이 걸림돌이 되었다. 다른 영지로 가려면 항구에 아예 발을 들이지 않은 채 마을을 빙 둘러 가는 게 옳았다. 남부에 있는 알랑 카르스텐의 저택이라던가. 아마 지도 없이도 쉬지 않고 말을 몰면 며칠 안에는 당도할 것이다. 페르낭은 금세 지루해졌는데, 이 모든 행보가 닳아빠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의 뻣뻣한 갈기를 어루만지다가 부를 이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순서대로 더한 권태가 몰려왔다.


하루는 꼬박 다섯 시간을 말을 달려 누가 보아도 내륙인 곳까지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지긋지긋한 단상은 여전했다.


상심할까?


이는 언제나 한결같은 방향으로 이어진다.


상심하겠지.


그는 어쩔 도리 없이 기대에 젖었고 이내 끔찍한 자괴감에 빠졌다. 길들었다는 수치심에 떨다가도 상대가 가여운 나머지 슬픔에 엉겨 붙었다. 하염없는 애정을 느낄 때면 숨결조차 달았으나 원망에 눈이 멀면 그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온갖 감정의 덩어리를 삼켰다. 제멋대로 추락하고 되살아나는 마음은 지극히 낯설고 온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은 언제나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활엽수의 숲에서, 떠들썩한 술집 앞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페르낭은 이름 없는 말의 고삐를 정반대로 돌렸다. 왔던 길을 되짚으며 돌아간다. 마실이라도 나갔다 온 듯 태연한 낯짝으로, 혹은 식사를 들겠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젠가는 빗방울을 뚝뚝 흘리는 모양새로 문을 열었다. 그리곤 대강 구상해둔 거짓을 읊었다. 소위 계약을 한 이후로, 그가 다른 곳에서 밤을 넘긴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초여름의 밤은 덜 익은 열기로 애매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발코니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소란스럽던 저택은 안락한 적막에 싸여 있다. 이곳의 여름은 이스마이어 보다 덜 덥고 건조한 편이다. 온종일 볕이 들자 소뵈르는 저택에 손님들일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페르낭은 외출조차 삼가고 삐딱하게 뺨을 괸 채 그 모양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전부 그가 아는 이름이었지만 탐탁지 않았다. 구실이 하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떠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게 더 정확했다. 이제 굳이 그가 이곳을 지키지 않아도 소뵈르는 외롭지 않다. 그는 소뵈르가 혼자 남지 않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동시에 더할 나위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높다란 천장 탓에 2층치고는 바닥이 멀었다. 겁이 많은 사람이라면 뛰어내릴 때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야 할 정도로. 전망 좋은 방에서 오솔길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바다뿐이다. 페르낭은 길을 헤아리려는 자그마한 시도를 내려둔 채 시꺼멓게 어둠을 품은 바닷물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해안선 근처 별에서도 총총 빛이 났다. 더위에 익은 풀 내음과 아주 멀리 들리는 파도 소리가 발코니에 가득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풍경 속에 둘이 서 있었다. 물끄러미 살피는 시선이 뺨에 달라붙었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고민 중이었다. 떠나는 발길을 잡은 건 그 수많은 치졸한 감정 중 무엇이었나?


“페르낭 님, 아직도 두려우신가요?”


정녕 두려움이었나. 페르낭은 그제야 소뵈르를 돌아보았다. 늘상 하는 말대로 어여쁜 얼굴이 있었다. 떠나지 못할까 봐 두렵다는 말에 소뵈르는 명료한 방안을 내놓은 전적이 있었다. 결국 페르낭은 손가락을 말아쥐며 순순히 수긍했다.


“그러니 부디…….”


해답을 제시하는 건 소뵈르에게 몹시 간단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행하는 것까지도. 가느다란 이성으로 천천히 말을 물린다. 영원히 곁에 있으라고 해달라는 애원이 혀에 단단히 매여있었다. 간청을 구걸하다니, 페르낭은 조그맣게 자조했다. 도대체 어찌 꼬인 심정이란 말인가? 그는 종종 자신을 소뵈르 레니에 카르스텐의 생에서 손꼽히는 악질이라고 여겼다. 언제나 선택하라고 종용했으나 정작 욕망을 숨기는 데 실패했고, 소뵈르는 무얼 원하는지 또렷이 아는 것처럼 매번 선뜻 발을 맞춰주었다. 소뵈르 레니에 카르스텐은 품을 내어주었고 손길을 내치지 않았으며 기만적인 계약을 수락했다. 애정을 인질 삼아 일방적으로 요구해온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제 손아귀가 쥔 목줄을 불공평하게 여겼고, 그럴 때면 어찌 다음을 확신하느냐는 맑은 목소리가 마음 밑바닥을 울렸다. 처음부터 페르낭은 지독스레 잘 알고 있었다. 애정을 주겠다며 오만하게 약속했으나, 정작 갈구해온 사람은 그 자신이라는 걸.



페르낭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 소뵈르의 앞으로 다가갔다. 손가락 끝이 조금 떨리는 탓에, 가늘게 겹치려던 손을 그대로 서서히 떨궜다. 가벼운 접촉으로 친근히 굴어서 마음을 열어야 했는데. 습관적인 전략 따위가 형태를 잃곤 새하얗게 스러진다. 대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호의니 애정이니 편리한 어휘로 도피하기 한참 전부터. 상대가 이해할만한 논리적이고 유려한 설득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끝끝내 뱉어야 할 언어를.


“나는 널 사랑해.”


말의 꽁무니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는 잠시 무대에 처음 선 배우처럼 낯선 감상을 숨기지 않았다. 시선이 늘어져 애꿎은 귀고리를 노려보기도, 초라한 고백을 하는 청년 같은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러기도 잠시, 마침내 그가 사랑하는 이와 눈을 맞추자 모든 것이 녹은 듯 풀어진다. 


페르낭은 옅게 웃었다. 그는 자신에게조차 믿음을 내주는 이가 아니었으나 지금만큼은 이 말이 진실임을 확신했다. 


“널 사랑해, 소뵈르.”


이 순간이 어쩌면 애타게 바라왔던 대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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