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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진배는 저녁어스름이 깃들무렵에야 미군정청에서 놓여나왔다. 바지주머니는 방금 받아넣은 권총이 묵직하게 들어있는데 머리는 텅 비여버린듯 아무 생각도 없었다.

래일 저녁이면 여기를 떠나 평양으로 가야 한다. 《쥐투》의 모사들은 배천으로 가서 치악산을 넘어야 한다고 그에게 침투경로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초행길에는 언제나 불안이 따르는 법이지만 그의 심기가 편치 않은것은 북으로 들어가는 경로가 미타해서도 아니고 자기 맡은 임무가 불안해서도 아니였다. 그의 심사가 편안치 않은것은 가문의 리권이 잠겨있는 보통강토목공사를 제손으로 파탄시켜야 한다는 기막힌 처지때문이였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미국사람들의 지시대로 작전을 성사시켜야 일신의 영달과 앞날을 담보받을수 있었다. 까짓거, 고향이면 어쨌단 말인가. 고향의 숱한 재부를 공산정권에 말짱 빼앗기고 야밤에 솔가도주해온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나군 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내가 못 가질바엔 아쉬운대로 말짱 쓸어버려야 한다. 구진배는 이를 사려물었다. 그래도 어쨌든 자기 집재산을 제 손으로 물거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바로 거기에 구진배의 모순이 있었고 비극적운명이 결정되여있는것이였다.

(내 운명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단 말인가?)

해방전에 일본에 가서 사각모를 쓰고다닐 때에는 그래도 제 머리로 사고하고 행동할 권리가 있었다. 그 덕에 당시 대학에서 류행하던 좌익서적을 몇권 읽어보고 그 죄로 경찰에 련행되여가서 고추가루물을 한모금 먹고는 머리속에 조금 잡아넣었던 빨간물까지 말짱 토해버리고말았다.

중요한것은 살아남는것이였다. 맑스의 사상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것을 목숨과 바꿀수는 없었다.

그때문에 그는 대학에서 왜놈경찰의 손발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고 그 대가로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평남도청의 말직에 앉아 자기의 진짜 주인인 일본거류민단의 생명재산과 리권을 보호해주는 파수병노릇을 해야 했다.

해방후 그는 집안에 들이박혀 전전긍긍하다가 소작료 3. 7제를 반대한다고 기고만장해서 윽윽하는 애비를 겨우 설득시켜 38도선을 넘었다. 해방열에 뜬 백성들이 자기네 등가죽을 벗겨먹던 애비는 물론이고 일제의 고등문관시험합격자로 총독의 표창장까지 받은 철저한 친일파인 자기를 가만놔둘리 만무했던것이다.

그런데 《자유》를 표방하는 남조선에 오면 예전처럼 떵떵거리며 살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남조선의 주인은 미군이였다.

구진배는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힘든 길을 포기하고 어제는 일본사람들의 손에, 오늘은 미국사람들의 손에 자기를 맡겨버린것이다. 따지고보면 자기 운명의 생사여탈권은 언제나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의 손에 쥐여져있지 않았던가. 이제는 다른 길이 없다.

그는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광화문거리를 따라 내려오다가 종로2정목으로 꺾어들었다. 길 량옆으로 처마를 맞대고 들어앉은 식당들과 유흥업소들에서는 초저녁인데도 벌써 불빛이 환하고 사람들의 래왕이 분주해졌다. 하루일에 지친 인생들 혹은 하루종일 유흥가의 도락을 그리며 저녁시간을 기다려온 무위도식자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고있었다. 여기는 야만인의 욕구를 충족시킬수 있는 곳이였다. 여기는 존엄이니, 사상과 리념이니 하는 온갖 관념적인것들은 전혀 무의미한것으로 치부되고 만물의 령장인 인간이 제아무리 신사인체 위선을 떨어도 결국은 짐승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는것을 확실하게 증명할수 있는 곳이였다.

구진배는 술생각이 나서 식당간판들을 훑어보다가 《에덴동산》이라는 캬바레에 눈길이 끌렸다.

식당안에 들어서던 구진배는 이곳에 왜 《에덴동산》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는지 리해되였다. 무대우에서는 선악과를 먹지 못했는지 창피를 모르는 《이브》들이 거의 알몸으로 다리를 흔들대고있었던것이다.

구석에 놓인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며 무대를 바라보느라니 무겁던 머리가 개운해지는것 같았다.

(식당이름을 참 잘 달았군. 《에덴동산》에서야 고뇌를 모르고 쾌락만 알수 있지. 저년들이 내가 싸탄이라는걸 알기나 할가. 하긴 여기서야 내가 싸탄이 아니지. 이북에 가야…)

그 생각을 하니 또 머리가 무거워졌다. 그는 괴로운 현실을 잊으려는듯 연거퍼 술잔을 기울였다.

구진배는 어지간히 시간이 흘러서야 식당을 나섰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길 한복판에는 사람들이 몰켜서있었다.

구진배는 잡스러운 무리에 섞이고싶지 않아 그대로 지나치려다가 인도로에 멀찌감치 선채로 지켜보았다. 길바닥에는 말이 무릎을 꿇고 엇비스듬히 넘어져있는데 마부가 사정없이 채찍을 내려치고있었다. 채찍을 맞을 때마다 말 못하는 가엾은 짐승은 앞발을 쳐들고 허공을 그러안으며 일어나보려고 안깐힘을 쓰다가 다시 곤두박질을 하군 하였다. 악에 받친 마부는 미군이 입던 헌 군복저고리앞섶을 제끼고 맵짜게 채찍을 휘둘러대건만 맥이 진할대로 진한 불쌍한 짐승은 커다란 코구멍을 벌름거리며 채찍세례를 고스란히 받고있었다. 커질대로 커진 동공에는 공포와 절망의 빛이 가득 담겼는데 이제는 일어나보려는 시도조차 포기한듯싶었다.

구경군들속에서는 동정과 비난의 목소리들이 끊기지 않았다.

《아이, 불쌍해라.》

《말 못하는 짐승이 무슨 죄가 있다구, 쯧쯧…》

녀학생복차림을 한 서너명의 처녀애들이 마부에게 들이댔다.

《아저씨, 때리지 말아요!》

《야 참, 때리지 말라는데…》

나중에는 한 녀학생이 격해서 소리쳤다.

《아저씨두 사람이예요? 말이 불쌍하지 않아요?》

마부는 허공중에서 휘파람소리가 나게 채찍을 휘둘렀다. 공기째는 소리가 아츠럽게 들리며 구경군들의 입을 단번에 틀어막았다.

《까불지 말구 제 갈길이나 가. 말이 못 일어서면 죽어! 알기나 해? 다섯식구 명줄이 이 말한테 달렸는데 말이 죽으면 내가 야단이지 너희들이야 무슨 걱정이냐?》

녀학생 하나가 눈이 올롱해서 물었다.

《아저씨! 말이 못 일어나면 왜 죽어요?》

《내가 그걸 알게 뭐야? 너희 선생님한테 물어봐라.》

녀학생들은 더 참견할수 없었다. 구경군들은 하나둘 흩어져갔다.

구진배에게는 채찍세례를 받고있는 불쌍한 저 말이 지금의 자기 처지와 일맥상통한데가 있는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수 없지만 어쨌든 자기도 제 운명의 고삐를 남에게 맡기고 싫든좋든 힘이 진할 때까지 순종할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한참이나 그쪽을 노려보던 구진배는 그 어떤 충동에 떠밀리워 성큼성큼 마부에게 다가갔다. 술기운에 더 대담해졌는지 어쨌든 가슴에 앙금처럼 쌓였던 울화가 한꺼번에 끓어올랐다. 금발머리 서기년에게 멸시당한것도, 버취에게서 받은 렬등인종에 대한 모욕감도, 평양으로 가야 하는 자신에 대한 서글픔도 동시에 분풀이할 대상을 찾아냈던것이다. 그렇게라도 자기 운명을 거역해보려는 일종의 몸부림이라고 할지…

《야!》

채찍을 든 마부의 손이 허공에서 멎어섰다. 구진배는 다가서자바람으로 철썩! 하고 마부의 귀뺨을 갈겼다. 또 한번 또 한번…

그리고는 바지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마부의 눈이 말눈깔처럼 커졌다. 구진배는 말대가리에 총구를 겨누고 고개를 돌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땅!》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여서 마부는 미처 만류할새도 없었다. 구진배는 양복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냈다. 거기서 손에 잡히는대로 끄집어내여 마부의 발치에 던져주었다.

대충 짐작으로도 호마 두마리는 살만 한 돈이였다. 마부는 얼이 나갔는지 돈을 주어들 생각도 못하고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구진배는 그 자리를 떠났다. 속이 좀 후련해졌다. 자기도 만일 죽게 되는 경우에는 머리에 대고 자총하는게 좋겠다는 엉뚱한 공상까지 해보았다. 지금이라도 무의식중에 권총을 이마에 갖다댈것 같아 주머니에서 손을 뽑고 걸었다.

그는 몸의 중심도 잡지 못하고 어두운 밤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인생길이란 이런것이다. 진창에 빠지기도 하고 더러운것을 밟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갈지자로 가다보면 그게 이미 정해진 운명의 길이라는것을 알수 있는것이다. 그걸 거역해보겠다고 리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정보로만 걷느라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참…

집에 들어서니 늙은 에미는 아래목에 자리를 펴고 누웠는데 애비 구문선은 비단보료를 깔고 사방침에 팔굽을 고인 자세로 비스듬히 앉아 화투로 신수를 점치고있었다. 다 늙은 인생에 무슨 앞날이 있겠다고 야밤삼경에 신수보는 놀음을 하느냐고 한마디 쏴주고싶었지만 한켠으로는 불쌍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서평양일대의 넓은 땅과 가문의 재산을 기울이였던 보통강토목공사의 리권을 해방바람에 날려보내고 달도 없는 그믐밤에 도적고양이처럼 38도선을 넘어왔으니 그 원통한 생각에 잠이 올리 없을것이다.

언제가면 잃었던 모든것을 되찾을수 있을가? 그때를 알아맞추느라고 남다 자는 깊은 밤까지 닳아빠진 화투목을 놓지 못하고있는것일가?…

구진배는 애비앞에 가앉았다.

《무슨 일이냐?》

구문선은 마뜩잖게 물었다. 당대 부모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식이 전에없던 정중성으로 무릎까지 꿇고 효자의 자세를 취하는걸 보면 긴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였다. 또 놀음돈을 달라는 수작인가?

《아버지, 전 래일 평양에 갑니다.》

《뭐라구?》

구문선은 화투목을 집어던지고 앉음새를 고쳤다.

《평양엘?… 거긴 왜?…》

《평양에서 보통강개수공사를 시작한대요. 미국사람들은 나한테 그걸 파탄시켜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공산당의 위신이 떨어지고 백성들이 뭉치지 못한다는거지요.》

보통강에 대한 말이 나오자 구문선은 볼편을 실룩거렸다. 잠시 생각하는듯 마는듯 하더니 손바닥으로 제 무릎을 때리며 결패있게 말했다.

《그래, 미국어른들의 뜻이 옳다. 파탄시켜야 해!》

구진배는 아버지의 립장이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만은 반대할줄 알았던것이다.

《아버지! 보통강토목공사야 아버지가 투자한 대상이 아닌가요?》

《이 시라소니같은 놈아!》

애비는 벼락같이 소리쳤다.

《네놈이 이 꼴을 해가지고도 아직 그따위 감상적인 소리를 하고있어? 공산당이 토목공사를 해서 백성들이 그 덕을 보면 저희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지켜보겠다고 기를 쓰고 덤빌텐데 그럼 우린 영영 제땅을 못 찾아! 우리 세상을 되찾지 못하면 그 공사의 리권도 영영 못 찾는단 말이다! 알기나 해? 그까짓 공사야 우리 세상이 온 다음에 마저 하면 될게 아니냐?》

구진배는 정신이 펄쩍 들었다. 늙은 말이 길을 안다더니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이제는 이발빠진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기만 하고 아무 맥도 못 추지만 그래도 아버지에겐 제나름의 확고한 립장이라도 있다. 그런데 자기는 구차스레 신세타령만 하면서 제 기분에 빠져있지 않았는가. 나 한사람의 존재라는것은 자기가 몸담고있는 계급이라는 큰 그릇에 담긴 모래알에 불과하다는것을 왜 망각했던가.

구진배는 이 공사의 운명이자 자기 가문의 운명이고 자기 운명이며 따라서 이발로 물어뜯어서라도 공산정권이 쌓는 제방을 허물어버려야 한다는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불쑥 물었다.

《아버지, 작인들중에 충실했던 놈이 없어요? 하다못해 어리숙한 놈이라도.》

《충실한 작인이라는건 애당초 말이 안되는것이고 어리숙한 놈을 골라보면… 가만있자… 그건 왜?》

《이번에 가서 손발노릇을 시켜볼가 해서요.》

구문선은 눈을 감고 웃몸을 흔들흔들하며 방금 머리속에 떠오른 소작인의 이름을 생각해내려고 애썼다. 언제 한번 제앞에서 머리를 못 들고 땅을 떼울가봐 쩔쩔매던 어리무던한 소작인, 평양에서 솔가도주하는 날 밤 대동강선창에까지 짐을 지고 따라와 공손히 허리굽혀 작별인사를 하던 소처럼 순한 소작인. … 이름이 뭐드라?… 구문선은 종시 생각나지 않아 토지문서를 꺼내 벌컥벌컥 뒤졌다.

《그렇지, 오성재! 오성재라고 토성랑에 사는 작인이 한놈 있다. 땅밖에 모르는 무골충이야.》

구진배는 오성재의 빚문서를 달래가지고 제 방으로 건너왔다.

잠자리에 누워서 궁싯거리는데 갑자기 지끈- 하고 벼락치는 소리가 귀를 멍하게 했다. 그는 화닥닥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물을 뿌려놓은듯 한 창밖에서는 비소리만 소란스레 들려왔다. 또 한번 새파란 번개가 밤하늘을 엇비슷이 째더니 꽈르릉!- 요란한 천둥소리가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무엇이 하늘을 크게 노엽혔는지 천둥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창대같은 비줄기는 어두운 공간을 꽉 메운것 같았다.

구진배는 마음이 심란해서 제대로 잠들수 없었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던 그는 아침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비는 멎고 하늘도 개였는데 집둘레에 파놓은 도랑으로는 흙탕물이 콸콸 흐르고있었다. 그는 뒤정원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그자리에 굳어졌다. 정원의 나무중에서 제일 큰 백양나무가 어제밤 벼락을 맞아 중둥이 잘리웠던것이다. 더 섬찍한것은 백양나무에 잠자리를 잡았던 참새들이 땅에 한벌 깔려있는것이였다. 구진배는 등골이 오싹해났다. 이 무슨 불길한 징조인가? 하필이면 내 집에 벼락이 떨어지다니? 하필이면 벼락에 맞아죽은 참새무리를 보자고 여태 아침산보를 모르던 내가 이쪽으로 발길을 했는가.

혹시 이게 앞날의 액운을 예고해주는건 아닐가?…

구진배는 얼른 발길을 돌렸다. 제집 정원에서는 마음대로 발길을 돌릴수 있어도 미국사람들이 정해준 길에서는 제 마음대로 돌아설수 없는 구진배였다.

그날 저녁 구진배는 졸개 한명을 대동하고 배천쪽으로 나와 밤중에 치악산을 넘었다. 두놈 다 큼직한 륙크샤크를 잔등에 짊어졌는데 거기에는 미군첩보부에서 넘겨받은 1천만원의 공작자금이 들어있었다.

이튿날 평양성안에 새여든 구진배는 그날부터 자기 임무수행에 착수했다.






20

 

리주연은 아침 첫시간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 도착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평양광성중학교 강당에서 진행된 보통강개수공사를 전인민적동원으로 완수하기 위한 평양시안의 각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합회의 결과를 알아보시기 위해 리주연을 부르신것이였다.

대기실에는 벌써 여러 사람들이 장군님의 접견을 기다리고있었다. 양복에 넥타이를 맨 신사풍의 사람도 있고 광목천으로 지은 옷을 입고온 로동자복차림의 중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학생복차림의 젊은이도 있고 낭자를 틀어올린 머리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녀인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흰 두루마기에 백고무신을 신고 수염을 한자나 기른 늙은이가 제일 유표했다.

그야말로 각계각층 대표들이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려 진을 치고있는것이였다.

리주연을 잘 아는 리병설이 눈인사를 하고나서 소곤소곤 알려주었다.

《장군님께서는 지금 종합대학건설기성회 성원들을 만나고계십니다. 벌써 한시간이 넘었는데…》

종합대학이란 말을 듣는 순간 리주연은 가슴이 후더워졌다.

우리 나라에 종합대학이 생긴다! 이 얼마나 희한하고 경이적인 사변인가! 리주연은 문득 장군님을 모시고 평남관개공사장을 돌아보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장군님께서는 평남관개공사를 품을 들여 잘해서 우리 농민들이 더이상 물고생을 모르고 농사짓게 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그날 리주연은 단조로운 가요곡만 듣던 사람이 각이한 악사들로 무어진 대관현악단의 장엄한 교향악을 처음 듣는듯 한 무아경을 또 한번 새롭게 체험하였다. 정녕 그이의 말씀 한마디한마디는 건국의 대교향악이였다.

해방후 오늘까지 반년남짓한 기간에 당을 창건하고 인민정권을 세우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들을 실시하고…

그뿐인가 보통강개수공사와 평남관개공사뿐아니라 온 나라 공장, 기업소들을 복구정비하거나 새롭게 일떠서고있는 이 기적같은 현실이 과연 창조와 건설의 교향악이 아니란 말인가.

거기에다 오늘은 또 종합대학을 비롯한 학교와 병원들까지… 참으로 전국의 크고작은 일감을 다 맡아안으신 장군님의 지칠줄 모르시는 정력과 무비의 담력으로 신생 조선은 자주독립국가의 새 모습으로 하루가 다르게 변모되여가고있었다.

리주연은 자기차례가 되자면 시간이 좀 걸릴것 같아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정원을 오락가락하며 그는 장군님께 보고드릴 련합회의정형을 요약해보았다.

어제 진행된 련합회의에서는 공사를 전인민적동원으로 진행하기 위한 결정서가 채택되였다.

결정내용에는 공사에 동원되는 시민들이 애국심을 발휘하여 로동능률을 높이는 문제, 각 단체들에서 맡겨진 책임량을 기어이 완수할데 대한 문제, 삽이나 곡괭이 같은 로동도구는 각자가 가지고나오며 들것은 현장에서 제공한다는 등 필요한 대책안들이 구체적으로 지적되였다.

하긴 장군님께서 련합회의방향을 세세히 가르쳐주시였으니 빈틈이 있을수 없었다. 련합회의결정에 따라 벌써 시안의 기관, 기업소, 공장들에서는 보통강개수공사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도록 정치사업이 벌어지고있었다.

리주연이자신도 며칠전부터 동평양지구의 공장, 기업소들을 찾아다니며 개수공사에 대한 소식을 알려주고 사람들을 궐기시켰다. 그가 동평양지구를 택한것은 해방전에 지구당소조를 결성하고 전민항쟁을 준비하던 시기 함께 싸우던 핵심들이 평양곡산공장, 평양화학공장, 평양고무공장에서 일하고있기때문이였다.

그중에는 평양곡산공장의 임성민도 있었다. 임성민은 리주연의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네 곡산공장에서는 로동자돌격대를 조직하여 공사장으로 달려나가겠다고 윽윽했다.

또한 거리와 마을, 학교의 이르는 곳마다에 공사와 관련한 격문, 표어, 설계도, 선전화, 벽보가 나붙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의례히 공사이야기가 기본화제거리로 되고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보통강개수공사소식으로 온 평양시가 끓기 시작했다. 어제 련합회의과정에 좀 애를 먹은것은 공사지휘부를 구성할 때 신민당과 청우당이 서로 눈치를 보면서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것이였다.

거기에는 리주연이 모르는 내막이 있었다.

신민당에서는 련합회의직전에 무기명투서를 받았는데 공산당이 주관하는 공사에 끌려다니면 당의 독자성이 무시되고 창당된지 얼마 안되는 신민당의 존재와 권위가 허물어질수 있으니 심사숙고하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었다.

당파싸움에서는 오랜 관록을 가지고있던 신민당의 상층부에서는 무기명투서의 내용을 무시할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좀 입비뚤어진 소리를 하댔는데 다른 단체대표들의 비판이 화살같고 또 공사에 안 참가하면 당이 민심을 잃을수 있다는것을 고려하여 할수없이 지휘부구성에 참가했던것이다.

청우당지도부에서도 편지를 받았는데 자연을 개조하겠다는것은 한울님을 믿지 않는 공산마귀들의 망동이므로 거기에 동참해서는 절대로 안될것이며 오직 한울님이 창조해놓으신 자연의 섭리에 복종하도록 교인들을 교화해야 할것이라고 씌여져있었다. 그래서 공사비용이나 좀 보태주고 돌아앉으려다가 서평양일대에 사는 교인들의 항의가 비발치듯 하는 바람에 안 참가할수 없었다.

그것은 평양에 기여든 구진배가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였다.

그는 비교적 점잖은 수법으로 공사를 반대하는 선전포고를 한셈이였다.

《부위원장동지!》

리주연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리병설이 달려오며 재촉했다.

《빨리 갑시다. 장군님께서 기다리고계십니다.》

《아니, 벌써?…》

차례로 보면 자기가 마지막이 아닌가 하는 뜻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부위원장동지부터 만나시겠다고 하시였습니다.》

리주연이 서둘러 장군님의 집무실에 들어서니 그이께서는 문가로 마주나오시며 리주연의 손을 잡아주시였다.

《기다리게 해서 안됐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리주연은 장군님으로부터 먼저 인사를 받고나니 송구함을 어쩔수 없었다.

《어제 련합회의가 잘되였다지요?》

《예.》

리주연은 가방에서 몇장의 서류를 꺼내여 장군님께 올렸다.

장군님께서는 의자에 앉으시여 문건을 한장한장 넘기시였다.

련합회의결정서, 평양시인민위원회가 작성한 격문, 보통강개수공사건국로력동원계획, 보통강개수공사총계획서, 보통강개수공사소요자재계획, 공사실시요강.

장군님께서는 맨마감에 공사지휘부구성에 참가한 정당, 단체들의 명단을 훑어보시고나서 문건을 한옆에 밀어놓으시며 리주연에게 물으시였다.

《그런데 공사지휘부 각 부서책임자들의 명단은 왜 없습니까?》

《그건 아직 결정짓지 못했습니다. 우선 총책임자부터 마땅한 적임자가 없어서 임명하지 못하고있습니다.》

《그건 왜요?》

《우리 도인민위원회 일군들중에도 이런 큰 공사를 책임지고 해본 사람이 없습니다.》

장군님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왜정때 그런 공사를 맡았던 사람이라면 친일파라는 소린데 어떻게 인민위원회에 있을수 있습니까?》

리주연은 열적게 웃었다. 장군님의 말씀을 듣고보니 애당초 있을수 없는 사람을 찾으려 했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웃음어린 어조로 뒤를 이으시였다.

《난 리주연동무가 공사 총책임을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제가 말입니까?》

리주연은 얼결에 말끝을 높였다.

《왜 놀랍니까? 경험이 없다는거겠지요?》

장군님께서는 미리 침을 놓으시고나서 말씀하시였다.

《우리가 어떤 경험을 가지고 건국을 하는거야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오직 인민이 잘사는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리념밖에 없습니다. 인민을 생각할줄 아는 사람이면 능히 이 공사를 책임질수 있습니다. 난 주연동무를 믿습니다.》

리주연은 장군님의 신임에 감격하여 다른 말을 할수 없었다.

《그리고 현장책임은 장혁수동무에게 맡기는게 어떻습니까?》

《장혁수동무를 현장책임자로 임명한단 말입니까?》

리주연이로서는 선뜻 대답올릴수 없었다. 지휘부를 꾸리는 문제에서 장혁수는 한번도 론의돼본적이 없었던것이다.

일군들은 도인민위원회 토목과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보고있던중이였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공사인가.

장군님께서는 리주연의 마음을 헤아려보시며 담담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장혁수동무는 보통강과 피눈물나는 사연이 얽혀있기때문에 이 공사의 중요성을 가슴에 새기고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곳에서 일해오면서 공사장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습니다. 주연동무는 그가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도리질하는것 같은데 공사장에 기술부를 따로 두고 매 공사구역마다 기술지도원들을 고정시키는 조건에서 크게 걱정할건 없지 않습니까?

내가 듣건대는 그 동무가 측량기도 다를줄 안다는데 그만하면 자격이 있는셈이지요. 내가 장혁수를 부디 추천하는것은 이 공사를 통해서 사람값에 못 들고 지지리 천대받으며 토성랑에서 살던 그를 새 조선의 기둥감으로 키우고싶기때문입니다. 우리가 인민의 힘을 믿고 인민이 주인된 나라를 건설하자고 하면서야 장혁수 같은 사람들을 왜 내세우지 못하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공사의 성과적완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것은 대중의 애국심을 발동하는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러자면 선전선동사업을 활발히 벌리는것과 함께 공산당원들이 공사의 앞장에 서야 한다는것을 다시 강조하시였다.

《평양시당위원회에서는 각 구당 및 세포조직들에서 모든 당원들에게 공사의 중요성을 똑바로 알려주고 대중의 모범이 되도록 조직사업을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혁신이 일어나는 곳에는 의례히 공산당원들이 앞장에 서있다는 인식을 주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리주연은 신심에 넘쳐 대답을 올렸다. 장군님의 집무실을 나선 리주연은 장혁수를 만나기 위해 공사장으로 떠났다.

장혁수는 리주연으로부터 자기가 시공책임자로 임명되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쉬나문명정도되는 사람들을 데리고있었지만 공사규모가 커지면 보통로동자로 일하리라 작정하고있던 혁수였다. 그도 그럴것이 자기야 배운것도 없고 연설도 할줄 모르고 수판도 튕길줄 모르는 막벌이군이 아닌가. 그런데 장군님께서 자기를 직접 천거해주시였다니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까지 천지개벽할수 있을가.…

리주연이 떠난 뒤에도 현장사무실에 홀로 남은 그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공연히 방안을 서성거렸다. 세상이 자기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자기 또한 이 세상에 살아야 할 리유를 분명히 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마음이 들뜬 그는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물걸레를 집어들었다. 아무렇게라도 몸을 놀리지 않고는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그는 전에없이 열성을 피우며 책상도 닦고 창문도 닦고 엉치를 하늘로 들고 황소숨을 몰아쉬며 마루도 닦았다. 이 공사장의 시공주였던 왜놈이 거드름스럽게 앉군 하던 가죽회전의자는 특별히 품을 들여 닦았다. 이제는 당당하게 이 방의 주인이 되였으니 지난날의 때를 말끔히 벗겨내야 할게 아닌가. 청소를 다 하고 방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지금껏 거들떠보지도 않던 선인장화분에 물도 주었다. 그것도 하나의 생명체인데 이제는 그 생명이 자기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그 화분이 별로 귀중해졌다. 참으로 주인의 눈은 모든것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게 해주는듯싶었다.

한참만에야 청소를 끝낸 그는 슬금슬금 량수책상앞에 놓인 가죽회전의자에 다가갔다.

그동안 이 방을 쓰면서 한번도 앉아보지 않았던 의자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의자가 제것이 된것이다.

혁수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아보았다. 다시 일어났다가 깊숙이 들어앉으며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실었다.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한바퀴 빙- 돌아보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장난군아이들처럼 행동한게 우스워 저혼자 웃었다.

그는 책상앞에 바로 앉았다. 그 자리에서는 공사장의 전경이 창문을 통해 환히 내다보였다.

그제서야 그는 자기가 이 자리에 앉아 빈둥거릴새가 없다는것, 김일성장군님께서 자기를 이 자리에 앉혀주신것만큼 일을 많이 해서 그분의 믿음에 보답해야 한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장혁수는 회전의자에서 일어났다.

봉수산기슭의 장석채취장에 야장간을 설치하기로 했는데 거기 나가볼 계획이였다.

탕, 탕…

누군가 나들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누구요?》

혁수는 자연히 역증을 냈다. 가만히 손기척만 해도 되겠는데 요란스레 솟을대문 두드리듯 할건 뭔가.

문이 벌컥 열리며 허우대 큰 젊은이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더벅머리에 광목으로 지은 적삼을 입은 젊은이는 거칠고 감때사나운데가 있어보였다. 이건 어디서 나타난 망아지야.…

혁수는 화가 치밀었다.

《여, 문두드리는 법도 몰라?》

젊은이는 피씩 웃는것으로 자기의 거친 행동을 사과했다.

젊은이가 웃는 모습은 어딘가 순진한 구석을 엿보게 해주었다.

《책임자를 만나러 왔수다.》

《책임자는 왜?-》

혁수는 맞갖지 않게 반문했다.

《거기가 책임자요?》

젊은이는 모를 일이라는듯 작업복차림의 혁수를 아래우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본 책임자들은 다 양복을 입었던데…》

혁수는 웃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니까 난 책임자같지 않다는거야?》

《글쎄 뭐…》

젊은이는 량해를 바라듯 또 순진하게 웃었다. 혁수는 은근히 밸이 꼴렸지만 젊은이의 솔직성을 탓할수는 없었다.

방금 현장에 나가려고 웃저고리를 벗어놓은 그는 베천으로 만든 돌찌바람인데다 꽁무니에는 땀에 절은 광목수건을 차고있어서 올데갈데없는 공사판의 인부차림이였던것이다.

《그래 어떻게 왔소?》

《여기에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요.》

《그럼 일하러 왔단 말이요?》

《예!》

혁수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하러 온 사람이 그에게는 제일 반가왔다.

《앉으라구, 이름이 뭔가?》

혁수는 젊은이에게 의자를 권하고 제자리에 가앉아 노트를 펼쳐들었다.

《리명덕이요.》

《집은 어딘가?》

《문수리요.》

《무슨 일을 하댔나?》

《특별히… 해방전엔 징용으로 만주에 가서 광산일을 했수다. 남포질이라면 눈감고도 자신있지요. 지금은 삯짐이나 지면서 살지요. 요즘엔 하루종일 역전에 나가있어야 삯짐군 쓰겠다는 사람도 없어요.》

장혁수는 펜대를 놓았다.

《그럼 자넨 여기 돈벌이하러 왔단 말인가?》

이번에는 명덕이가 의아해졌다.

《그게 뭐 어쨌어요?》

《허참. 이 청맹과니같은 친구야, 여긴 돈받구 일하는데가 아니야!》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일 시키구 돈 안 주는데가 어디 있소?》

혁수에게는 명덕이를 말로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돈벌이하러 왔다면 썩 물러가! 여기는 애국로동을 하는데란 말이야! 세상일에 영 깜깜이군.》

명덕이도 지려 하지 않았다.

《그럼 먹구 사는건 어떻게 하오? 뭘 먹구 일하는가 말이요? 가족은 어떻게 하구? 책임자한텐 가족이 없소?》

불시에 혁수는 의자를 탁 밀어제끼고 일어섰다. 회전의자는 드르륵- 밀려나가다가 바람벽에 부딪쳤다. 혁수는 돌덩이처럼 틀어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사나운 눈길로 명덕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은 어쩌자고 남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가.

혁수는 으르렁거리는 맹수마냥 이발을 악물고 나직이 말했다.

《나가! 어서 나가!》

방안의 공기는 험악해졌다. 명덕은 책임자가 왜 갑자기 성났는지 알수 없었다. 어쨌든 그냥 버티고있으면 좋은 일이 없겠다는것을 그는 륙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별수없이 사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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