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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장식용으로 놓아둔 것인지는 몰라도, 오래된 호텔에는 종종 TV 아래에 자그마한 구형 라디오가 발견되고는 하였다. 다이얼을 돌리면 한참을 소리가 나지 않다가도 희미하게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때로는 말소리를, 때로는 느린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곡을 뱉어내곤 하던, 양 손바닥에 가득 들어차는 나무 상자 안의 기계.

로비는 닉스의 새로운 거주지였다. 권역의 관리자인 비제에게서 얻어낸 방을 자신은 잠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게임 한 판에 아란에게 떠맡긴 것은, 체크인을 한 지 고작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잠들지 않는 제게 그토록 커다란 방은 무척이나 넓은 관이나 다름없었던가. 그렇다고 룸메이트를 들일 아량도 가지지 못하니 선택의 폭은 한없이 좁아지기 마련이었다.


― …님. 있잖아요, 만약에 레지스가… 아니, 뱀파이어가 되지 않았다면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을까요?


반쯤은 소음에 흐려진 이름 모를 클래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문득 그런 물음이 파고 들어온다. 빛 아래에서나 겨우 금빛으로 반짝이던 옅은 잿빛 머리의 소년은 제 무릎에 기대어서는 그런 실없는 가정을 꺼내어 놓기를 즐겼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여름의 과일을 닮은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면, 자신도 그에 대한 답을 꺼내어 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그 때 무어라 대답했더라. 인간이었을 적을 기억하지도 못할 뿐더러 인간으로서 살지 않은 세월이 아득하리만치 길어졌기에,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다 권역의 인상깊은 인간 몇의 행적을 적당히 섞어 꾸며내었을 것이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세계는 겹쳐질 수 없고, 포식자가 피식자의 자리로 끌어내려지는 일 또한 존재할 리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제게는 구태여 상상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비를 싫어하게 된 것은 필시 이 날의 기억 끄트머리가 빗방울로 흐려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스스로도 잊었을 이름으로 불리며 아, 비가 오나 봐요. 그런 말과 함께 손이 이끌렸던 순간만은 모든 것이 흐려진 와중에도 빛 바랜 사진처럼 다른 색채로, 그렇지만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있잖아, 지난 천 년 동안은 내내 도망치는 생각만 했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기를, 아니면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무척이나 긴 꿈이기를.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나의 눈이 다른 색을 띄고 있기를. 이미 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떠나온 탓에, 무언가가 바뀌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러면… 반드시 무엇인가는 끝나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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